이종삼 목사가 1988년 능포 갈릴리교회에 부임한 직후 ‘늘노래 찬양단’을 초청한 집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고향 거제를 떠난 건 1975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10년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부산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꿈에 그리던 목사가 됐다. 신학교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사역도 자연스럽게 부산에서 시작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부산 동래중앙교회에서였다. 첫 아이도 부산에서 낳았다.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었다.
사역과 생활이 안정될수록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 건 첫 약속 때문이었다. 목사가 된 뒤 거제로 돌아와 사역하겠다던 고등학생 때의 약속이었다. 85년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은 커졌다. 하지만 부산에서 너무 잘 적응하는 가족을 볼 때면, 그리고 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면 거제를 향한 나의 마음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결정의 시간이 가까워 왔다. “주님, 새해부터는 제가 거제에서 사역을 하겠심더. 저에게 용기를 주이소.”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아내에게 털어놓기만 하면 됐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에 있는 얘기를 했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면서 거제에서 사역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부터 부산에서의 사역과 삶이 편하지만, 목사가 많지 않은 거제에서 할 일이 더 많아 지체할 수 없다는 말까지 다 하고 말았다.
아내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분명히 봤다. 그런데도 내 약속을 존중해줬다. 고마웠다. 연말에 교회를 사임하고 86년 1월, 아무것도 없는 거제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품에는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첫아들이 안겨 있었다.
나를 반긴 건 소금기 가득 머금은 바닷바람뿐이었다. 나조차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부산서 잘 있다 왜 왔노’ ‘분명 부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기라.’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두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당장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집도 없었다.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처가에 둥지를 틀었다. 나도 막막했는데 아내는 오죽했을까. 부산에서 병원에 다니던 아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모든 게 느껴졌다. 거제로 돌아온 뒤 한동안 아내는 부끄러운 마음에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야 이 얘기를 들었는데 아내의 속 깊은 배려에 울컥했었다.
목사가 주일 사역도 하지 않고 있으니 장모님께서 출석하시던 교회 목사님이 거제 장목교회를 소개해 주셨다. 마침 교회에 담임목사가 계시지 않았다. 다행히 교인들도 나를 반겨 주셨다. 장목교회는 내 첫 담임 사역지가 됐다. 목사가 되기 전 기도대로 고향의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보람이 무척 컸다.
여기서 2년 동안 사역하다 88년 5월 첫 주 거제 능포리에 있던 갈릴리교회에 부임했다. 이 교회가 바로 지금까지 내가 섬기는 교회다. 목회하면서 동시에 또 하던 일이 있었다. 고향 거제에 YMCA를 세우는 것이었다. YMCA를 통해 거제 젊은이들에게 기독 시민운동의 씨앗을 심고 싶었다. 이를 위해 작은 명함을 만들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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