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 기자
마산YMCA 아침논단 100회 강연
급격한 경제 성장 부작용들 짚어
서열화된 사회 속 노동자만 불행
개인 인권 배제·과로 사회 가속화
경제 규모 걸맞은 진보적 시각 필요
직장 내 민주화·비정규직 축소 시급
세계 패권 다툼 시기...한국 위기 경고
"외교적 운신 폭 늘려 피해 최소화해야"
한국은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으로 선진국에 포함될 만큼 충분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발전'과 '개발'은 한국 사회에서 최우선 가치입니다. 이것들이 가려버린 뒷면에는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이자 어머니고 아버지인 평범한 시민입니다. 러시아계 귀화 한국인이지만 누구보다 한국에 대한 통찰력이 깊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마산YMCA 아침논단 100회 강연자'. 자리의 무게를 거뜬하게 감당한 강사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였다. 지난 20일 창원을 찾은 박 교수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 숨겨진 부작용들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노동자가 탄압당하고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현실 속 박 교수가 내놓은 혜안은 강연 참석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박노자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가 20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마산YMCA 제100회 아침논단에 참석해 '한국사회 현실과 미래전망'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철저하게 서열화된 한국 사회 = 박 교수는 한국 사회 구조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개발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 바뀌었지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힌 서열 중심 사회는 그대로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러한 서열화 된 사회에서는 부를 직접 생산하는 이들이 점유하는 위치가 대단히 낮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구성을 보더라도 기업인, 대학교수, 법조인이 대다수다. 한국인 대다수가 임금 노동자지만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은 거의 없다. 결국 고소득 직업군 일부가 과대표되고 과연 이러한 구조가 공정한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서열 아래쪽에 있는 노동자들의 무한 희생으로 이 구조가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서열화된 사회에서 위쪽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살고 아래쪽은 가장 힘들게 산다. 많은 노동자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로, 산재 사망 사고도 모두 서열 아래쪽에서 발생한다."
박 교수는 서열화된 사회 특징 가운데 하나로 개인이 기업에 식민화되는 현상을 꼽았다. 서열이 중요한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개인 삶 주기가 직장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대다수가 이러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고 학창 시절부터 학습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한국에서는 학습 노동 시간도 상당하다.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 준비로 죽어라 공부하면서 이를 체화한 것이다. 이는 나중에 직장 생활할 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죽어라 일하는 거다. 어릴 때부터 효율성 높은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에 투입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 속에서는 인권 감수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또 기업 내 자리 잡은 군대식 상명하달 문화도 노동자 개인을 지우는 데 일조했다고 봤다.
"한 사람의 인권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가 존재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며 직장 내 갑질 같은 문제도 자주 생긴다. 한국에서는 직장 내 갈등 수준이 아닌 폭언, 폭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갑질이 많이 발생하는 것도 서열화된 구조의 특징이다."
마산YMCA 아침논단 100회 강연자로 지난 20일 창원을 찾은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한국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무한 경쟁 한국 사회, 생존 가능성에 물음표 = 박 교수는 서열화된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으로 당장은 선진국이 됐지만, 앞으로 이 구조가 유지된다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극심한 불평등 구조와 낮은 출생률, 행복지수, 수도권 집중 등을 고려했을 때 물리적인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 합계출산율이 0.78인데 이는 북유럽 국가들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한 경쟁 구도를 비롯한 높은 사교육 비용, 주택 투기가 만들어낸 땅값 상승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든 게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도 한국 사회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봤다. 수도권 집중으로 땅값 상승을 가져왔고 국토 균형발전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본사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다. 모든 것이 전자로 비대면으로 가능한데, 무조건 본사를 서울에 두려고 하는 것은 문제다.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자료사진. /pixabay
박 교수는 개발 논리를 내세우며 무분별한 자연 훼손 역시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짚었다. 인간을 피폐화하는 구조 속에서는 자연도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석유나 가스를 생산하지 않지만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보면 세계에서 최대 수준이다. 한국 제조업이 에너지 집약적이기 때문인데, 기후정의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하지는 않다. 기후위기는 전 인류가 가장 급하다고 말하는 의제이기 때문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도 이를 의식하고 고민해야 한다."
◇주변국에서 핵심국 된 한국, 나아가야 할 길은? = 박 교수는 한국이 외국 자본을 들여와 재가공하던 주변국에서 이제는 자본을 수출하는 핵심국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국외에서 한국 자본 영향력이 큰데, 국외에 있는 한국 업체 노동자만 1000만 명으로 추산했다. 한국이 국내에 머무는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진보적 시각을 갖춰 세계 시장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그러려면 △탈 서열화 △부의 재분배 △비정규직 축소 △국민 복지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현재 한국 노동시장이 비정상적인 구도라고 평가했다. 한국만큼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정규직을 두는 경우를 철저하게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03년 32.6%던 한국 비정규직 비율은 2021년 38.4%, 2022년 37.5%로 오히려 늘어나며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황이다. 또 이러한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2021년 기준 11.8%)보다 2배 이상 높다.
그는 나아가 노동자가 일터 주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제도만 민주화됐지 개인 삶은 아직도 민주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노조 조직률이 10%대다. 직장 내에서 민주화는 꿈도 꾸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수치다. 일상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면 진정한 민주화라고 할 수 없다. 노동자가 경영참여권을 획득할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그는 서열화 완화를 위한 해법으로는 학벌주의 타파를 제시했다. 같은 국·공립대학이라고 해도 정부 지원금 자체가 다른 것을 지적하며 사실상 국가가 서열화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공립대학 평준화를 위해 통합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서울대를 국립대 몇 호 정도로 인식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비생산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교육 비용 감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강연을 끝맺으며 박 교수는 앞으로 10~20년이 한국에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열강들이 세계 패권 다툼을 벌이는 시기 한국이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전략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집권 세력이 구상하는 방향은 한쪽에 일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미국의 관계를 유지하되 중국도 방문하고 그러면서 한국의 몸값을 높여가야 한다. 운신 폭을 조금씩 늘려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이상적인 노선이다."
/박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