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로 태어난다. 침팬지는 어미의 몸에 난 털 때문에 새끼가 그 털을 잡고 어미의 젖꼭지에 도달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만, 몸에 털이 없거나 아주 작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미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이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욕구도 어미의 관심과 선의에 의해서만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미(엄마)는 아이에게 절대자(신)의 위치에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 욕구충족을 위해 어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인간은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의 울음소리는 욕구충족을 요구하는 최초의 언어이며 어미는 그래서 아이의 울음과 표정을 해석하는 해석자의 위치에 높이게 된다. 아이의 서투른 언어는 부모의 잘못된 해석을 낳기 마련이고 그래도 의미 있는 소통은 아이가 언어적 능력을 최소한으로 획득하는 순간까지 암호를 해석해야 하는 수준의 고난도의 지점에 있다는 점을 부모들은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큰놈이 18개월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다. 아이는 ‘맘마’를 엄마에게 요구했고 아내는 아이의 요구에 친절하게 응답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아이는 번번이 엄마가 제공하는 맘마를 거부하면서 1시간이 넘도록 칭얼거렸고 아내는 폭발했고 끝내 칭얼거림을 멈추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내며 아이를 내팽개쳐 버렸다. 둘 사이의 소통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아내는 이 상황을 그냥 칭얼거리는 아이의 고집으로 해석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가 큰아이의 칭얼거림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위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아이의 절실한 현재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어는 맘마였지만 여러 가지 아이의 요구에 대응하면서 큰놈이 물을 먹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고 물을 아이에게 건네자 아이는 칭얼거림을 멈추고 다시 활발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물이 먹고 싶은데 ‘맘마’라는 단어밖에 찾아내지 못한 18개월짜리 아이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면 결국 아이의 요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답을 찾아내는 결정적인 책임을 아직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의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충족의 요구가 엄마(큰타자)에게서 질책으로 돌아온다면 이것은 아이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자기 존재의 욕구충족에 대한 표현이 해석의 실패를 통해 징계로 돌아온다면 아이는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에 대한 최초의 좌절을 경험할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성장 서사가 소통과 욕구충족의 실패로 점철된 좌절과 트라우마로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청소년 중에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가 많아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때가 있다. 지금도 청소년 청년의 자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증상적 의제이다. 심리 해부자들은 자살하는 사람이 수많은 방식으로 “나는 죽기 싫어요. 살려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심리적 불안과 우울, 사회적 좌절로 인한 절규는 반복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행동과 언어 속에 도움과 살고 싶은 절규로 점철된다고 하는 데 우리 사회는 그들의 이런 처절한 목소리를 듣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데에 정밀하거나 섬세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큰 사회 심리적 상처와 대결할 때 누구에게 대화와 도움을 요청할까? 가장 많이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대는 또래 집단과 친구들이다. 좋은 친구가 고통을 나누어지고 친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지속한다면 이 친구는 그런 인정과 지지를 통해 다시 살아갈 동기나 힘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던 부모, 특히 엄마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한 번쯤은 왜 그럴까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의 미래에 대한 설계를 곧잘 자신의 삶의 임상학적 역사와 결핍의 내용을 중심으로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조금 어렵더라도, 혹은 아무리 어려워도 계속해서 앞으로 전전해 나가면 끝내 부모가 바라는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지원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한국 부모의 노력을 이런 차원에서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YMCA 간사로 1990년부터 대구YMCA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청소년 동아리 활동과 위기 청소년 사업을 통해 한 가지 배운 점이 있어 소개하고 싶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을 꽃피우기 위한 열망으로 가극차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인 사회에서 실현해 나가는 경험과 기술은 취약한 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만난 좌절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문제를 친절하게 나눌 수 있는 한국의 상담과 지지망은 부족하면서 동시에 상투적이다. 청소년 담당간사로서의 경험과 사무총장 시절을 거치면서 나는 자식 두 놈에게 어떤 나의 기대도 투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단지 정말 절박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위기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그리고 극단적 선택의 경계에 이르는 아픔은 내 자식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자식에 대한 바램이 생겼다. 청소년이 위기지점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는 이런 멋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아이를 밀어붙이는 부모님들을 아이가 절망 속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천둥 같은 큰소리도 알아채지 못한다. 사실과 아이의 현실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아이의 인생경로에 강력하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아이에게 내 삶의 욕망을 투사하는 자리에서 아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서 표현하는 어려움을 같이 나누고 공유하고 인정하는 자리가 우리 부모들이 서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닐까 늘 상 생각해 본다. 우리 아이가 극단적 상항에 처했을 때에 거 상황을 감지하고 친절하게 반응하며 그 안에서도 싹트고 있는 아이의 꿈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역할, 그것을 아이를 위한 부모의 최선의 자리라는 위치 이동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께 권해보고 싶다. 그리고 “아이의 인생은 아이 스스로 꿈꾸게 인정하라!”는 부탁을 꼭 드리고 싶다. 부모의 역할은 그래서 센터가 아니라 골키퍼의 자리가 아닐까 이른 아침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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